금융 자본주의의 포식과 제조업의 몰락: 투자 금융 출신 경영자가 초래하는 구조적 파괴
1. 서론: 두 세계관의 충돌과 제조업의 위기
현대 산업 생태계에서 관찰되는 가장 불안한 징후 중 하나는 ’만드는 자(Maker)’의 영역이 ’세는 자(Counter)’의 논리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도의 엔지니어링 역량과 장기적인 R&D 투자가 요구되는 제조업의 정점에 투자 은행(Investment Bank), 사모펀드(Private Equity), 혹은 재무 전문가(CFO) 출신의 경영자가 들어섰을 때, 기업은 일시적인 재무 지표의 개선을 경험하지만 이내 구조적인 경쟁력 상실과 참담한 붕괴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본 보고서는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경영 스타일의 차이가 아닌, 기업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세계관—’가치 창출(Value Creation)’을 중시하는 공학적 마인드셋(Engineering Mindset)과 ’가치 추출(Value Extraction)’에 최적화된 재무적 마인드셋(Financial Mindset)—의 충돌에서 기인함을 규명한다.
특히 사모펀드의 약탈적 인수합병(LBO),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단기 성과 압박, 그리고 대기업 내부의 재무 통제 타워가 제조업 현장의 ’암묵지(Tacit Knowledge)’와 혁신 역량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심층 분석한다. 보잉(Boeing)의 추락, 제너럴 일렉트릭(GE)의 해체, 인텔(Intel)의 기술적 패배, 그리고 최근 삼성전자가 직면한 위기 상황은 모두 ’금융의 논리’가 ’기술의 본질’을 압도했을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비극이다.1 본 보고서는 방대한 문헌 연구와 사례 분석을 통해, 재무적 합리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제조업 파괴의 메커니즘을 낱낱이 파헤친다.
2. 금융화(Financialization) 이론과 가치 전도 현상
2.1 보유 및 재투자에서 감원 및 분배로의 전환
제조업의 본질은 이익을 잉여 현금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제품과 공정을 위해 재투자하는 데 있다. 윌리엄 라조닉(William Lazonick)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거대 제조 기업들은 이익을 조직 내부에 유보하여 설비와 인력에 재투자하는 ‘보유 및 재투자(Retain-and-Reinvest)’ 전략을 통해 성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가 득세하고 금융 전문가들이 경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기업의 목적은 ’주주 가치 극대화(Maximizing Shareholder Value)’로 변질되었다.6
이 새로운 패러다임 하에서 제조 기업은 ’물리적 실체’가 아닌 ’금융 자산의 포트폴리오’로 간주된다. 투자 회사 출신 경영자들은 기업의 이익을 R&D나 설비 투자(CAPEX)에 투입하는 것을 ’현금 흐름의 비효율’로 인식하며, 대신 인력을 감축하고 사업부를 매각하여 확보한 현금을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주에게 환원하는 ‘감원 및 분배(Downsize-and-Distribute)’ 전략을 채택한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ROE(자기자본이익률)와 주당순이익(EPS)을 급등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생산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행위이다.8
2.2 공학적 마인드셋 대 재무적 마인드셋의 대립
제조업 경영 실패의 근원에는 두 가지 상반된 사고방식의 충돌이 존재한다. 엔지니어링 마인드셋은 물리적 세계의 제약을 극복하고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와 중복 투자를 ’필수적인 학습 비용’으로 간주한다. 반면, 재무적 마인드셋은 자본의 효율적 배분과 리스크 회피를 최우선으로 하며, 불확실한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를 ’낭비’로 규정한다.
| 비교 항목 | 공학적 마인드셋 (Engineering Mindset) | 재무적 마인드셋 (Financial Mindset) |
|---|---|---|
| 기업의 정의 |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기술 조직 | 현금 흐름을 창출하는 자산의 집합 |
| 핵심 목표 | 기술 혁신, 품질 완결성, 시장 리더십 | 주가 부양, 배당 확대, 자본 효율성(ROIC) |
| 직원관(觀) | 축적된 노하우를 가진 자산 (Human Capital) | 줄여야 할 고정 비용 (Cost Center) |
| 투자의 기준 | 기술적 실현 가능성과 장기적 파급력 | 내부수익률(IRR)과 회수 기간(Payback Period) |
| 리스크 인식 | 기술적 실패, 안전 사고, 제품 결함 | 재무적 손실, 유동성 위기, 주가 하락 |
| 성공 지표 | 제품 성능, 수율, 특허, 시장 점유율 | EBITDA, EPS, 잉여현금흐름(FCF) |
투자 회사 출신 경영자가 제조업에 진입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비효율의 제거’이다. 그러나 제조업, 특히 반도체나 항공우주와 같은 첨단 산업에서의 ’여유(Slack)’는 비효율이 아니라 위기 대응 능력이자 혁신의 원천이다. 재무적 최적화는 이 여유를 제거함으로써 기업을 예기치 않은 충격에 극도로 취약하게 만든다.9
3. 사모펀드(PE)의 약탈적 기법: 제조업의 해체와 가치 추출
3.1 레버리지 매수(LBO)와 죽음의 부채 나선
사모펀드(Private Equity)가 제조업체를 인수하여 망가뜨리는 가장 전형적인 수법은 차입 매수(Leveraged Buyout, LBO)이다. PE는 인수 자금의 대부분을 피인수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한 대출로 충당하고, 이 부채를 피인수 기업의 장부에 얹는다. 건실했던 제조업체는 하루아침에 막대한 이자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빚더미에 앉게 된다.
영업이익이 이자 비용을 갚는 데 소진되면서, 설비 유지보수, R&D, 숙련공 교육에 투자할 여력은 사라진다. 토이즈러스(Toys “R” Us)의 사례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KKR, 베인 캐피털(Bain Capital), 보나도(Vornado)는 2005년 토이즈러스를 인수한 후 과도한 부채를 떠넘겼고, 회사가 파산으로 치닫는 동안에도 자문 수수료 등의 명목으로 4억 7천만 달러 이상을 챙겨갔다.1 제조업체가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기계가 고장 나도 부품을 갈지 못하고, ‘테이프를 붙여서’ 돌리는 상황이 발생하며, 이는 품질 붕괴의 서막이 된다.
3.2 세일 앤 리스백(Sale-Leaseback): 미래를 팔아 현재를 사는 행위
투자 금융 출신 경영자들이 선호하는 또 다른 기법은 ’세일 앤 리스백(Sale-Leaseback)’이다. 이는 제조업체가 보유한 공장 부지와 건물을 매각하여 현금화하고, 다시 임대료를 내고 사용하는 방식이다. 재무제표상으로는 자산이 현금으로 바뀌어 유동성이 풍부해지고 ROA(총자산이익률)가 개선되는 ’마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제조업체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거세하는 행위이다. 자가 공장을 보유한 기업은 불황기에 공장 가동률을 낮추며 버틸 수 있지만, 임대 공장을 사용하는 기업은 매출이 없어도 매달 고정된 임대료를 지불해야 한다. 샵코(Shopko)와 같은 기업들은 PE에 의해 부동산이 매각된 후 과도한 임대료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했다.14 제조업에서 부동산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생산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기반이다. 이를 금융 상품화하여 단기 배당 재원으로 쓰는 것은 기업의 뼈를 깎아 피를 파는 것과 같다.
3.3 전략적 파산과 연금 의무의 회피
더욱 악질적인 수법은 ’전략적 파산’을 이용한 비용 전가이다. 사모펀드는 인수한 제조업체가 경영난에 빠지면, 파산 보호 신청을 통해 노동자들의 연금 지급 의무나 환경 정화 책임과 같은 ’우발 채무’를 털어버린다. 이 과정에서 경영진은 파산 직전 수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챙겨 떠나고, 남겨진 노동자들과 지역 사회는 경제적 황폐화의 고통을 짊어진다.12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비용으로만 간주하는 극단적인 재무적 사고의 결과이다.
4. 제너럴 일렉트릭(GE)의 몰락: 잭 웰치의 유산과 제조업의 금융화
4.1 잭 웰치, 위대한 경영자인가 파괴자인가
제너럴 일렉트릭(GE)은 토머스 에디슨이 설립한 미국 제조업의 자존심이었으나, 1981년 취임한 잭 웰치(Jack Welch)에 의해 철저하게 금융화되었다. 웰치는 “1등 아니면 2등이 되라, 그렇지 않으면 매각하라“는 슬로건 하에 수많은 제조 사업부를 매각하고, 그 빈자리를 GE 캐피털(GE Capital)이라는 금융 부문으로 채웠다. 전성기 시절 GE 이익의 절반 이상이 제조가 아닌 금융에서 나왔다.3
웰치는 매 분기 월스트리트의 예상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실적을 내놓아 ’경영의 신’으로 불렸으나, 이는 GE 캐피털의 자산을 이용한 회계적 조정(Earnings Management)의 결과였다. 그는 제조 현장의 투자를 줄이고, R&D 예산을 삭감하여 단기 이익을 쥐어짜는 방식을 후임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이는 제조업체로서 GE의 근본적인 체력을 고갈시켰다.
4.2 제프리 이멜트와 터빈 블레이드의 교훈
웰치의 후임인 제프리 이멜트(Jeffrey Immelt) 시대에 이르러 GE의 문제는 폭발했다. 2008년 금융 위기로 GE 캐피털이 타격을 입자, 현금 창출원이 사라진 GE의 제조 부문은 부실한 민낯을 드러냈다. 특히 전력(Power) 사업부의 몰락은 상징적이다. GE는 원가 절감을 위해 터빈 블레이드의 설계를 변경하고 검증 과정을 단축했다. 그 결과, 2018년경부터 텍사스와 프랑스 등지에서 GE 터빈의 블레이드가 부러지는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결함이 아니었다. 재무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엔지니어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리한 원가 절감과 납기 단축을 강요한 경영진의 실패였다. GE는 결국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에서 퇴출당하고, 항공, 헬스케어, 에너지 등 3개 회사로 쪼개지는 운명을 맞이했다.17 잭 웰치 키즈들이 주창한 ’효율성’이 결국 기업의 해체로 귀결된 것이다.
5. 보잉(Boeing)의 비극: 안전을 비용으로 치환한 대가
5.1 맥도넬 더글러스 합병과 문화의 변질
보잉의 몰락은 1997년 맥도넬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와의 합병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보잉은 엔지니어들이 주도하는 회사였고, 맥도넬 더글러스는 재무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회사였다. 합병 후 경영권을 장악한 것은 맥도넬 더글러스 출신의 경영진이었고, 그들은 보잉의 문화를 “비행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주가 수익을 만드는 회사“로 바꾸어 놓았다.19
해리 스톤사이퍼(Harry Stonecipher) 전 CEO는 “사람들은 오만하게도 보잉이 훌륭한 엔지니어링 회사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훌륭한 비즈니스 회사여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이 ’비즈니스 마인드’는 787 드림라이너와 737 MAX 개발 과정에서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그들은 신형 기체 개발 비용을 아끼기 위해 50년 된 737 기체를 재활용하고, 엔진 위치 변경에 따른 불안정성을 MCAS라는 소프트웨어 땜질로 해결하려 했다. 이는 엔지니어링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 결정이었으며, 결국 346명의 목숨을 앗아간 두 번의 추락 사고로 이어졌다.
5.2 스피릿 에어로시스템즈 분사와 품질 통제권 상실
재무적 경영의 또 다른 실패 사례는 핵심 제조 공정의 아웃소싱이다. 보잉은 2005년 자산 경량화와 현금 확보를 위해 캔자스주 위치타(Wichita) 공장을 사모펀드인 Onex에 매각하여 ’스피릿 에어로시스템즈(Spirit AeroSystems)’를 설립했다.20 보잉 동체의 70%를 생산하는 핵심 공장을 외부 업체로 만든 것이다.
이 결정은 보잉의 재무제표에서 고정비와 인건비를 덜어냈지만, 동시에 품질에 대한 통제권도 앗아갔다. 사모펀드 소유 하의 스피릿은 수익성을 위해 숙련공을 해고하고 저임금 비숙련 노동자로 대체했으며, 생산 속도를 높이라는 압박을 가했다. 2024년 1월 알래스카 항공 1282편의 도어 플러그(Door Plug) 이탈 사고 조사 결과, 도어 플러그를 고정하는 볼트 4개가 누락된 사실이 밝혀졌다.22
5.3 볼트 4개의 경제학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볼트 누락은 단순한 작업자 실수가 아닌 구조적 문제였다.25 보잉과 스피릿 간의 복잡한 서류 절차, 잦은 재작업, 그리고 무엇보다 “일정을 맞추라“는 경영진의 압박이 현장의 안전 절차(볼트 체결 확인)를 건너뛰게 만들었다. 보잉은 품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2024년 스피릿을 다시 83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20 아웃소싱으로 절감한 비용보다, 사고 수습과 재인수에 든 비용이 훨씬 컸다. 이는 “품질은 공짜가 아니지만, 품질 실패는 기업의 목숨을 요구한다“는 제조업의 철칙을 무시한 결과이다.
6. 인텔(Intel)과 반도체 패권의 상실: CPA가 반도체를 설계할 때
6.1 엔지니어 CEO의 퇴장과 재무적 최적화의 시작
인텔은 앤디 그로브(Andy Grove), 크레이그 배럿(Craig Barrett) 등 전설적인 엔지니어 CEO들이 이끌던 기술 중심의 회사였다. 그러나 2005년 마케팅 출신의 폴 오텔리니(Paul Otellini)와 이후 CFO 출신의 밥 스완(Bob Swan)이 경영을 맡으면서 인텔의 우선순위는 ’기술 초격차’에서 ’재무적 효율성’으로 이동했다.4
밥 스완 시절 인텔은 R&D 투자보다는 자사주 매입(Stock Buybacks)과 배당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었다. 2011년에는 143억 달러, 2014년에는 108억 달러를 자사주 매입에 썼다.4 이 돈은 차세대 공정 기술(EUV 도입 등) 개발에 쓰였어야 할 자금이었다. 재무 전문가들은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는 서버용 CPU 시장(데이터센터)의 독점적 지위에 안주하며, 불확실성이 큰 파운드리 투자나 모바일 칩 개발을 등한시했다.
6.2 모바일 혁명의 기회를 걷어차다
가장 뼈아픈 실책은 애플 아이폰에 들어갈 칩 공급 제안을 거절한 사건이다. 당시 오텔리니 CEO는 아이폰의 예상 판매량이 인텔의 칩 개발 비용을 상쇄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재무적 계산’ 끝에 스티브 잡스의 제안을 거절했다.26 엔지니어링 관점에서 모바일 컴퓨팅의 잠재력을 보았다면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 이 결정으로 인텔은 모바일 시대를 통째로 놓쳤고, 그 빈자리를 치고 들어온 TSMC와 ARM 진영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인텔이 10나노, 7나노 공정 전환에 실패하며 지지부진하는 동안, 경쟁자인 TSMC와 AMD는 기술적 리스크를 감수하며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팻 겔싱어(Pat Gelsinger)가 기술직 출신으로 복귀하여 “재무적 지표가 아닌 엔지니어링이 회사를 주도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잃어버린 10년의 기술 격차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인텔의 사례는 ’현재의 현금 흐름’에만 최적화된 재무적 결정이 어떻게 ’미래의 생존’을 위협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이다.
7. 삼성전자의 위기: 관리의 삼성이 기술을 잠식하다
7.1 사법 리스크와 재무 통제 타워의 강화
최근 삼성전자가 겪고 있는 반도체 경쟁력 약화와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의 실기는 한국형 재무 경영의 폐해를 보여준다. 이재용 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및 불법 승계 의혹 재판이 5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삼성의 경영 체제는 극도로 보수화되었다.27 오너의 부재와 법적 리스크 속에서 그룹을 이끈 것은 과거 미래전략실 출신의 재무/인사 라인(사업지원 TF)이었다.
이들은 ’관리의 삼성’이라는 명성답게 치밀한 수치 관리와 원가 절감을 추진했지만, 기술적 모험을 극도로 기피했다. 현장 엔지니어들의 증언에 따르면, 새로운 기술 도입이나 설비 투자를 제안하면 복잡한 보고 라인과 재무적 타당성 검토 과정에서 “수익성이 보장되느냐“는 질문에 막혀 좌절되는 경우가 빈번했다.5 이는 기술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가 재무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7.2 HBM 실기와 기술 리더십의 균열
AI 시대의 핵심 메모리로 떠오른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준 것은 뼈아픈 실책이다. SK하이닉스가 기술적 난이도가 높은 MR-MUF 패키징 기술에 과감히 투자할 때, 삼성전자는 기존 공정을 개량하여 원가를 낮추는 데 집중했다. 재무적 관점에서는 기존 설비를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으나, 기술적 관점에서는 AI가 요구하는 고성능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29
또한, 재무 라인이 주도하는 인사 평가는 단기 성과에 치중되어, 장기적인 기술 과제에 도전하는 엔지니어보다 당장의 수율을 높이거나 비용을 절감한 관리자에게 보상을 주었다. 이는 우수 인력의 이탈과 조직 내 보신주의를 심화시켰다. “기술의 삼성“이 “재무의 삼성“에 포위되면서, 세계 1위라는 안일함 속에 혁신의 DNA가 퇴화한 것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전영현 부회장을 반도체 수장으로 앉히며 ’반성문’을 발표한 것은 이러한 위기감을 반영한다.30
8. 암묵지(Tacit Knowledge)의 상실과 현장의 붕괴
8.1 회계장부에 없는 자산
제조업 경영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투자 회사 출신 경영자들이 ’암묵지(Tacit Knowledge)’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노나카 이쿠지로(Nonaka Ikujiro)의 지식 창조 이론에 따르면, 기업의 지식은 매뉴얼이나 데이터로 표현되는 ’형식지(Explicit Knowledge)’와 개인의 경험과 숙련도에 내재된 ’암묵지’의 상호작용(SECI 모델)을 통해 창출된다.31
재무제표에는 기계 설비의 가격은 기록되지만, 그 기계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20년 차 엔지니어의 노하우는 자산으로 기록되지 않고 단순히 ’높은 인건비(비용)’로만 나타난다. 따라서 재무적 구조조정의 칼날은 언제나 고연봉의 숙련 기술자를 향한다. 이들이 해고되거나 조기 퇴직하면, 기업은 인건비를 절감하지만 동시에 문제 해결 능력과 공정 개선의 원천을 상실한다.
8.2 잃어버린 지식의 비용 (The Cost of Lost Knowledge)
암묵지가 사라진 현장에서는 사소한 문제가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기계의 미세한 진동 소리만 듣고도 고장을 예견하던 장인이 사라지면, 기계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아무도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를 수리하기 위해 외부 컨설턴트를 부르거나 설비를 교체하는 비용은 인건비 절감액을 훨씬 상회한다.33
또한, 암묵지는 ’도제식 교육’과 ’오랜 협업’을 통해 전수되는데, 잦은 인력 교체와 아웃소싱은 이 지식 전수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GE와 보잉의 품질 저하, 최근 한국 조선업계의 숙련공 부족에 따른 납기 지연 등은 모두 ’사람’을 비용으로만 본 재무적 시각이 초래한 ‘지식의 단절’ 현상이다. 제조업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을 쳐내면 기술도 나간다.
9. 허상의 효율성: 왜 비용 절감이 비용을 증가시키는가
9.1 품질 비용(Cost of Quality)의 역설
재무 전문가들은 품질 비용을 줄이기 위해 검사 인원을 줄이고, 테스트 과정을 생략하며, 저가 부품을 사용한다. 그들은 이를 ’원가 절감(Cost Saving)’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품질 예방 비용’을 줄여 ’품질 실패 비용(Cost of Failure)’을 폭증시키는 행위이다.
하인리히 법칙과 유사하게, 설계 단계에서 1달러를 아끼면 생산 단계에서 10달러, 고객에게 판매된 후에는 100달러, 리콜과 소송 단계에서는 1,000달러의 비용이 발생한다.35 보잉 737 MAX의 MCAS 소프트웨어는 공기역학적 재설계 비용을 아끼기 위한 꼼수였으나, 결과적으로 수십조 원의 손실과 브랜드 가치 파괴를 가져왔다. 재무적 모델링은 당장의 1달러 절감은 확실하게 반영하지만, 미래의 1,000달러 손실 확률은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한다. 이를 ‘확실한 작은 이익을 위해 불확실한 파멸적 손실을 감수하는’ 도박이라고 한다.
9.2 공급망의 취약성과 JIT의 배신
재고(Inventory)를 죄악시하는 JIT(Just-In-Time) 시스템은 재무적 효율성의 정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투자 회사 출신 경영자들은 이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여유 재고 제로’를 강요한다. 이는 평시에는 현금 흐름을 극대화하지만, 팬데믹이나 지정학적 분쟁과 같은 위기 시에는 공급망 전체를 마비시킨다.
자동차 반도체 대란 당시, 재고를 최소화했던 완성차 업체들은 공장을 세워야 했지만, 도요타와 같이 ’비상 재고’를 관리했던 기업은 타격을 최소화했다.37 또한, 협력업체에 대한 끊임없는 단가 인하(CR) 압박은 협력업체의 R&D 여력을 박탈하여 부품 품질을 떨어뜨리고, 결국 최종 제품의 경쟁력을 갉아먹는다. 생태계를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금융적 시각은 공멸을 부른다.
10. 결론: 제조업의 부활을 위한 제언
투자 회사 출신이 제조업을 망하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성공 방정식’이 제조업의 본질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돈을 만들기 위해 물건을 만드는 척하는 것”**에 능숙하다.
- 시간의 지평(Time Horizon)의 불일치: 금융 자본은 분기 단위로 평가받지만, 산업 기술은 10년 단위로 성숙한다. 이 시차를 견디지 못하는 자본은 혁신의 싹을 자른다.
- 지표의 함정: 재무제표는 과거의 결과일 뿐 미래의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재무제표가 깨끗해지는 순간이 기업이 망해가는 순간일 수 있다.
- 사람과 기술의 존중: 제조업의 주인은 주주가 아니라 현장의 엔지니어와 노동자다. 이들을 비용이 아닌 자산으로 대우하는 ’공학적 리더십’의 복원이 시급하다.
결론적으로, 제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재무 책임자(CFO)가 최고경영자(CEO)의 오른팔이 될 수는 있어도, 머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제품이 좋으면 이익은 따라온다”**는 엔지니어의 단순한 믿음이, **“이익을 맞추기 위해 제품을 희생한다”**는 금융가의 복잡한 기교보다 언제나 옳았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제 다시 공장으로, 현장으로, 그리고 기술로 돌아가야 할 때다.
11. 참고 자료
- Slash and burn: is private equity out of control? - The Guardian, https://www.theguardian.com/business/2024/oct/10/slash-and-burn-is-private-equity-out-of-control
- Financial impact of the Boeing 737 MAX groundings -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Financial_impact_of_the_Boeing_737_MAX_groundings
- CNBC: The Tragic History of GE’s Disastrous Decline - Bill George, https://billgeorge.org/article/cnbc-the-tragic-history-of-ges-disastrous-decline/
- How Intel Financialized and Lost Leadership in Semiconductor Fabrication, https://www.ineteconomics.org/perspectives/blog/how-intel-financialized-and-lost-leadership-in-semiconductor-fabrication
- Engineers leave Samsung Semiconductor due to management’s neglect of expertise, https://biz.chosun.com/en/en-it/2025/07/10/JAB5QBYZ25CG3P2MKQORTBDV7I/
- William Lazonick - Research at UMass Lowell, https://www.uml.edu/profile/william_lazonick
- The Financialization of the U.S. Corporation: What Has Been Lost, and How It Can Be Regained, https://digitalcommons.law.seattleu.edu/sulr/vol36/iss2/17/
- The Financialization of the US Corporation: What Has Been Lost, and How It Can Be Regained, https://www.ineteconomics.org/uploads/papers/FinancializationUSCorporation.pdf
- Finance Vs Engineering? | CareerVillage, https://www.careervillage.org/questions/1038853/finance-vs-engineering
- How I Used My Engineering Mindset to Fix My Finances (And How You Can Debug Yours), https://medium.com/@projxplorer/how-i-used-my-engineering-mindset-to-fix-my-finances-and-how-you-can-debug-yours-857562a78ada
- Why do people still choose engineering when finance is less work (school) but pays more? Why do people do engineering and hope for an MBA when they can just do finance in the first place? - Quora, https://www.quora.com/Why-do-people-still-choose-engineering-when-finance-is-less-work-school-but-pays-more-Why-do-people-do-engineering-and-hope-for-an-MBA-when-they-can-just-do-finance-in-the-first-place
- Private Equity is Out of Control and Looting America. This Prosecutor Says We Can Fix It., https://www.ineteconomics.org/perspectives/blog/private-equity-is-out-of-control-and-looting-america-this-prosecutor-says-we-can-fix-it
- Top 5 LBO Deals that Failed - The Modeling School, https://www.themodelingschool.com/blog/top5-lbo-failed
- Private Equity: In Essence, Plunder? - CFA Institute Enterprising Investor, https://blogs.cfainstitute.org/investor/2024/08/02/private-equity-in-essence-plu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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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eing Is Buying the Company Responsible for Its Door Plug Blowing Out in Mid-Air, https://futurism.com/boeing-buying-spirit-aerosystems-door-pl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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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hip Insider®– Intel’s Woes: Are a “string of accountant CEOs” the Root of the Problem?, https://www.techinsights.com/blog/chip-insiderr-intels-woes-are-string-accountant-ceos-root-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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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nowledge Emergence: Social, Technical, and Evolutionary Dimensions of Knowledge Creation, http://pustaka.unp.ac.id/file/abstrak_kki/EBOOKS/KNOWLEDGE%20MANAGEMENT%20Knowledge%20emergence,%20social,%20technical,%20and%20evolutionary%20dimensions%20of%20knowledge%20creatio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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